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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의 지명 유래

삼한시대때 구례를 중심으로 섬진강 유역에 “고랍”이란 부족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고랍”이란 명칭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꾸라” “꾸리”로 변하여 백제때에는 구차례(仇次禮)라고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구례”로 고쳐졌으며, 다음과 같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일설도 있다.
백제시대 때의 중앙관제는 6좌평 22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중 두 좌평이 서로 반목하고 세력다툼을 하다가 마침내 간신이 득세를 하게 되고 충신은 하야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충신 좌평은 노경에 이르러 서울에서 머물만한 연고도 없이 오랜 생각 끝에 산자수명한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기로 결심하고, 찾아온 곳이 바로 구례의 봉성산하로 이곳에 조그마한 초가 한칸을 마련하고 땅을 일구며 가족끼리 단란한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 수년이 지나자 과거 간신이었던 좌평 역시 전과(前過)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벼슬을 사직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곳이 또한 구례 (당시는 봉성고을) 마을이다.

옛 속담에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다고 과거불화로 서로 반목하던 두 좌평이 다같이 야인이 되어 산중의 적막한 곳에서 만나게 되니 과거 서로 반목했던 일들은 깨끗이 잊고 서로 다정하게 예를 갖추어 당시의 조정근황 등을 얘기하다 밤이 되었으나 집은 단칸방 하나뿐이어서 서로 걱정한 끝에 먼저 내려온 좌평이 이 지방의 지리에 익숙하다하여 집을 비워주니 찾아왔던 좌평이 감격하여 백배사은(百拜謝恩)하고 가져왔던 금은보화를 다 바쳤다고 한다.

이리하여 서로 구원(舊怨)을 씻고 화함을 이루어 잘 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이 백제왕에게 전해져 두 좌평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 동시에 봉성고을 이름을 과거 원수가 만나 차례로 예를 갖추었다고 하여 구차례현(求次禮顯)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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